어릴 적 나는 단 한 번도 옥수수가 전통적인 곡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뭐 당연히 한국에서 유래한 음식은 아닐 수 있겠지만, 어쩌면 중국 혹은 유라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되었고 지금껏 먹어온 음식일 거라 믿었다. 그렇지 않은가? 토마토나 파인애플? 이런 작물은 딱 봐도 이름부터 서양의 향이 줄줄 난다. 종종 먹긴 하지만, 양식 요리에서나 쓰일법한 이름이다. 그에 비해 옥수수는 어떤가. 누가 봐도 친숙하기 짝이 없는 이름 아닌가. 우리는 시골에 가면 큰 솥에 옥수수를 잔뜩 쪄주는 진부하지만, 전통적인 장면이 쉽게 머릿속에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인도 여행 중 만난 몇십 혹은 몇백 원에 불과한 군옥수수를 먹으며, 그건 꽤 섣부른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옥수수의 역사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시작된다.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지고, 유럽에서 다시 중국으로 전해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지는 기나긴 여정 끝에 우리에게 전해진 작물이다. 생각보다 국내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토마토나 파인애플도 (심지어는 고추까지도) 아메리카에서 유래한 작물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꽤 쉽게 음식에 대한 첫인상을 갖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의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 멀리 바다 건너, 옥수수의 고향인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문명에서는 마치 이러한 신화가 틀렸다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마야 신화 뽀볼 부에 따르면, 신은 처음에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으나 젖으면 금세 허물어버려 적절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어째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았지만 영혼이 없어 신을 섬길 줄을 몰랐다. 그러다 동물들이 찾아온 재료인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전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웠고 신을 숭배할 줄 알았다고 한다.
중앙아메리카 사람에게 그만큼 옥수수가 중요했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인의 신체는 정말 옥수수에서 유래한 탄소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를 입에 달고 사는 멕시코인이 아니더라도, 음식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옥수수투성이다. 돼지, 닭, 소 등의 가축? 그들의 주요 사료는 옥수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나 음료수에서 주로 쓰이는 액상과당, 종종 식품에 함유된 비타민 C 등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성분이 모두 옥수수에서 유래한다. (정확히는 옥수수 전분을 기초로 제조된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이런 언급이 나오는 걸 보고, 학생 때 실제로 국내에서도 그런 건지 알고 싶어 국내 유명 식품 기업에 문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경계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몇몇 기업은 신기하게도 꽤 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 답변을 종합해 보면 '예전에는 고구마 전분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옥수수 전분으로 만들고 있다.'라는 결론이었다.
재밌지 않은가? 옥수수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몰랐던 나는,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모를 옥수수를 하루하루 먹어대고 있다.
참조 자료
- http://koweekly.co.uk/news.php?code=&mode=view&num=8782&page=1&wr=jgs
-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다른 세상, 2008
※ 본 글은 종종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깁고 더해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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