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좋고 싫음이 명확히 갈리는 작가다. 나 또한 그의 소설보다는 그가 ‘맥주 회사에서 만드는 우롱차’라고 표현한, 비교적 힘을 빼고 쓴 글인 수필을 선호하는 편이다. 기억은 멀겋게 희석되어 중학생 시절 읽었던 <상실의 시대>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그중 한 장면은 여전히 나의 뇌리에 명확히 남아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데이트하던 여성인 미도리를 따라 그녀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방문한다. 미도리를 돕는 차원에서 와타나베는 그 병실에 그녀의 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된다. 입원한 채 통 식욕을 찾지 못하는 그의 상황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서 들어온 간단한 음식이 놓여있다.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낀 와타나베는 놓인 음식 중 오이를 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 아삭아삭 맛있게도 먹는다. 무기력하던 그녀의 아버지도 그것을 보고 오이를 맛있게 먹는다는 장면이다.
그저 글자로 그려진 장면일 뿐인데, 그 아삭대는 오이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재료도 아니었기에 나는 호기심에 오이를 길게 자르고, 김을 바싹하게 구워, 간장에 찍어 먹어 보았다. 청량한 오이와 바삭한 김의 조화가 과연 매력적이었다. 훌륭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 정돈 아니겠지만, 참 매력적인 맛이랄까? 술을 몰랐던 어린 나이였지만 '이런 튀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맛이야말로 술안주의 맛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술과 오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연구가 있다. TAS2R38 유전자는 오이나 호박 등의 쓴맛을 인식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PTC 용액으로 미맹 검사를 할 때, 맛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가 갈리는데, 바로 이 유전자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 TAS2R38의 유전자형만으로 오이 혐오자와 오이 마니아가 선 그어지듯 나눠지진 않는다. 식품에 대한 선호도란 게 그렇게 단편적으로 정해질 리 없으니까 말이다. (이 유전자 때문에 쓴맛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느끼면서도 오이를 즐기는 인간이 분명히 있겠지) 그래도 해당 유전자형에 따라 쓴맛에 민감한 정도가 다르니, 당연히 채소뿐만 아니라 술의 쓴맛에도 반응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유전자형으로 구분하면 술 소비 양상도 눈에 띄게 다르지 않을까? 라는 게 관련 연구자가 세울 수 있는 당연한 가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최근 연구를 보면 딱히 해당 유전자는 술 소비 양상과 연관이 없어 보인다. 술에는 순수한 쓴맛만 아니라 각종 달달한 감미료가 섞여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술 섭취할 때만큼은 다른 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오이의 쓴맛에 무너져 퉤! 하고 뱉을지언정 술은 포기할 수 없었던 인류의 발악일지도.
오이 혐오자가 아니라면 하나 추천해 보고 싶은 오이 레시피가 있다. 바로 오이 샌드위치다. 몇 번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도 나와 이제는 꽤 유명해진 샌드위치다. 오이 따위가 이렇게 맛있다니,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달까? 만드는 방법은 꽤 간단하다. 얇게 자른 오이를 소금에 절여두고 물기를 잘 뺀 후, 그리스식 요구르트나 크림치즈와 섞어 빵에 발라먹는 것이 끝이다. 물론 여기에 후추, 딜, 마늘, 레몬즙, 꿀 등을 취향에 따라 추가하기도 한다. 간단하고 맛있는 샌드위치이니 꼭 해보시길. 하루키식 오이와 오이 샌드위치를 먹어보고도 오이가 영 내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오이를 혐오할 자격이 충분하다.
참조 자료
- Lipchock, Sarah V., et al. "Human bitter perception correlates with bitter receptor messenger RNA expression in taste cells." The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98.4 (2013): 1136-1143.
- Choi, Jeong-Hwa, et al. "Genetic variations in taste perception modify alcohol drinking behavior in Koreans." Appetite 113 (2017): 178-186.
- Kurshed, Ali Abbas Mohammad, Róza Ádány, and Judit Diószegi. "The Impact of Taste Preference-Related Gene Polymorphisms on Alcohol Consumption Behavior: A Systematic Review." International Journal of Molecular Sciences 23.24 (2022): 15989.
※ 본 글은 종종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깁고 더해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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